사주명리학

조선시대 명리학 연구

청무장 2010. 3. 30. 19:13

조선시대 명과학[사주명리학] 연구

구중회(공주대학교 교수)


   Ⅰ 서론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조선시대의 명과학命課學은 요사이 말로 ‘국가검정 고시’이다. 6칸 자리 추길청諏吉廳을 만들어 국가를 비롯한 왕실의 양길良吉을 예측하고 활용하던 조선의 정부 기구였다.

  동양에 있어서 ‘명’이란 원래 천명天命을 중심으로 인명人命을 공덕과 관련시켜 관찰하던 정신과학의 일종이다. 사주명리에 삼명三命이란 본명本命, 수명隨命, 봉명逢命 따위를 말한다. 본명이란 자기가 타고난 정명定命으로 숙명적인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수명은 이와는 달리 공덕功德을 쌓아서 빚어지는 명이다. 숙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다. 수명이 개인적인 성격이 짙은 것이라면, 봉명은 사회적인 성격이 짙다. 인물이나 시대를 만나 변화되는 명을 말한다. 이것이 ‘명’의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삼명’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역을 연구하려는 것이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이다. 그러나 연·월·일·시의 사주로 명을 알아보려는 학문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아직 그 범주나 방법이 분명하지 않다. 아직은 소수의 사람들이 ‘법술法術’로 인식되는 단계이지 이론과 체계를 획득하지 못하여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오늘에 있어서 사주명리학은 과거의 명과학보다 많은 부분 정교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덕을 쌓는 일’이나 ‘시대나 인물을 만나는 일’을 소홀이 하면서 기능주의로 빠지고 있다. 더구나 조선 시대의 책력과 관련된 ‘택일’ 개념[옛날은 택일에 의하여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공휴일이 곧 ‘길일’이 되어 버렸다.] 

  명과학에 관련된 자료는《경국대전》, 《대전회통》 따위의 법전집의 소략한 소개와 본격적인《서운관지書雲觀志》1)(1818 성주덕成周德)자료로 하여 명과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Ⅱ 명과학의 잡과[기술직]적 내용


  ‘서운관’은 고려 시대[충렬왕 34년 즉 1308]의 용어이다. 조선 시대에는 세조 12년 즉 1466에 들어서 관상감觀象監으로 바뀌게 된다.

 《서운관지》편찬자인 성주덕成周德은 1759년 태어나 정조와 순조 시대에 관상감에서 활동하던 관원이다. 자는 현지顯之, 본관은 창녕이다. 1783년 계묘식년시에 관리로 입문하여 관상감 정正 등을 거쳐 1786년 三曆官이 되었다. 두 차례의 겸교수와 동반 정직正職으로는 사포서司圃署 별제와 尙衣院 주부를 지냈다. 자급은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성주덕은 《서운관지》이외에도 서수호徐浩修, 김영金泳(1749~1815) 등과 같이《國朝曆象考》를 편찬하기도 했다.

  관상감에 근무하는 관리는 녹관직과 전문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녹관직은 체아직遞兒職으로 관상감의 최고위직인 정3품 정正보다 더 높은 당상의 자급에 오르기도 했다. 전문직은 이동이 없이 장기간 근무하는 특징이 있어서 이중적인 관리체계였던 것이다. 명과학의 관리체계는 추길관諏吉官, 수선관修選官, 총민聰敏, 권지權知, 생도生徒까지가 있었다.

  명과학 훈도訓導는 처음에는 2명이였으나 1명이 되었다. 명과학 관리 가운데 주부 이상의 녹관직을 지낸 관원들 중에서 가려서 임명되었다. 후보를 추천할 때에는 천문학과 명과학의 임관들이 모여서 권점圈點[붓 뚜껑으로 찍어서 많은 숫자를 받은 순]으로 결정했다. 정조 신해년부터 추길관 가운데 판관 이상의 녹관직을 지낸 관리 가운데 임명되었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체아교수가 2명인데 천문학과 명과학이 각각 1명씩이었다. 지리학과 명과학이 돌아가며 맡던 자리였는데, 1791년부터 명과학에 전속되었다. 역시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취길관은 정원이 7명[실제 명과학 합격자 중에서 취길관은 그리 많지 않다.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으로 양길을 가리는 일을 맡는 명과학의 실질적인 관리였다. 이전에는 명과학에 근무하는 자를 특별한 이름이 없이 모두 일관日官이라 불렀고 정원도 없었다. 정조 신해년[1791]에 7명으로 인원수를 정하고 ‘諏吉’이라 불렀다. 또한 修選官을 두고 크고 작은 選吉의 일을 담당하게 했다. 추길관의 빈자리가 생기면 수선관중에서 시험을 보아 올려주고, 수선관의 자리가 비면, 전함前銜[현재 맡고 있는 직이 없이 근무하는 사람]들 중에서 뽑았다. 이정釐正을 가하여 절목을 만들고 새로 임명된 후에는 6개월마다 시행하는 녹취재의 예에 따라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

  별선관은 총정원이 50명인데, 명과학과 지리학이 각각 10명씩이다. 영조 병술년[1766]에 처음으로 이 제도가 도입되었다. 과거를 거친 자와 거치지 않은 자를 가리지 않고 각각 본업을 시강해서 약略 이상의 성적을 밭은 자는 선정했다. 선발된 자는 우선 시험 성적에 따르고 다음에 직차에 따라서 ‘별선관’ 자리가 비는 대로 채워 임명했다.

  총민은 총정원이 14명인데 명과학과 지리학이 각각 2명씩이었다. 첨정 이하이면서 나이가 40이 안된 자들 중에서 해당 관청에서 권점하여 임명하고 각각 그 술업을 익히게 하였다.

  생도는 총정원이 60명인데, 명과학과 지리학이 각각 10명이었다. 각 해당 학에서 가부를 상의하여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뒤에 훈장訓長[명과학은 1명]과 훈부訓副[일정 정원이 없음] 제도가 생기고 했다. 명과학 훈장은 해당 우두머리가 맡으며 추길청의 7명 가운데 우두머리를 제외한 6명이 훈과訓課했다.

  위와 같은 체제가 되기 전에는 이습관肄習官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천문天文·지리地理·명과命課 등에 정통한 자를 이습관이라 하여 각 전공분야의 일을 보게 하며 전력前歷이 있으면 무록관無祿官의 예에 의하여 임용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명과맹命課盲의 채용이다. 서반 9품 체아직 2 자리를 주고 있다.《성종실록》5년 11월 무인조에 의하면, 실제로 관상감에서는 맹인을 모아서 명과학을 수련하게 하여 사맹삭四孟朔에 취재取才하여 관직을 수여했다 근무는 일 년에 네 번 인사 이동하여 서로 바꾸어 임명했다. 근무일수가 400일이 되면 관계官階를 올려주되, 천인賤人은 종6품에서 그치도록 제한하고 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명과학겸교수命課學兼敎授 1인을 종6품을 [속편]에는 새로 둔다고 했다가 [증보편]에서는 없앤다고 하고 다음 [증보편]에서는 다시 복원한다고 되어 있다. 그 만큼 부침이 많았다고 할 것이다.


  관상감은 원래 경복궁 영추문 안과 북부 광화방에 있었으나 불에 타서 창덕궁 금호문 밖[본감 1688년]과 경희궁 개양문[분감 1702년]에 다시 세웠다. 그 외에 흠경각欽敬閣[1770], 인력소印曆所[1766년] 따위가 있었다.

  명과학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관은 추길청諏吉廳이 있고 보조 기관은 삼력청三曆廳과 日課청) [6칸이다. 곧 삼력관(三曆官)이 회아(會衙 아문(衙門) 안에서 회동함)하는 곳인데, 영조 신해년(辛亥年 1731, 영조 7)에 청사 뒤에 세웠다.]

  추길청(諏吉廳) [6칸이다. 곧 명과직려(命課直廬)인데, 정조 갑인년(甲寅年 1794, 정조 18)에 삼력청 동쪽에 처음 세웠다.]

  일과청(日課廳) [6칸이다. 곧 진헌(進獻)·반사(頒賜)를 구관(句管)하는 곳인데, 관천대 동쪽에 있다.]

   예비 관리의 천거는 시험이 없이 추천과 심사만으로 시행되었다. 이들 추천과 심사는 관상감의 관리만이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녹관이 일차로 하고 이차는 삼력청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서 천문학에서 주관하다가 각각 해당 학에서 이루어지다가 통합하여 삼학에서 모여 이루어졌다.

  명과학에서 하는 일은《서운관지》선택조와 반사조에 제시되어 있다. 선택조에는 향사祀享, 연하讌賀, 조회, 봉책, 힐융詰戎, 행행行幸과 같은 ‘나라의 일’과 관례와 혼례, 이사, 입학入學, 교우와 같은 ‘백성의 일’을 점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향, 조하, 봉책, 動駕, 試士, 閱武의 길일을 잡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왕실의 출생과 일년의 운세, 관직수여 등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일의 하나로 책력과 부적의 진헌과 반사도 들어 있다.   


  Ⅲ 명과학 시험 과정과 문헌 정보


   시험은 선발하는 시험2)과 취재取才의 승진 시험의 두 부류가 있다. 선발 시험은 관상감에서 이름을 등록한 다음에 실시하는 데 예비시험과 본시험이 있다. 


[예비시험]

  원천강袁天綱(외운다), 서자평徐子平, 응천가應天歌, 범위수範圍數, 극택통서剋擇通書, 경국대전(책을 펴놓고 한다)을 강을 받는다.


[본시험]

  명과학은 2명으로 정한다. 본조[관상감]에서 본감本監의 제주와 함께 이름을 등록한 다음에 시험을 실시한다.


  취재 시험은 선발 시험과 다소의 과목 차이가 있다


  원천강袁天綱 책을 보지 않고 강론한다.

  삼신통재三辰通載, 대정수大定數, 범위수範圍數, 육임六任, 오행정기五行精記, 극택통서剋擇通書, 자미수紫微數, 응천가應天歌, 서자평徐子平, 현여자평玄輿子平, 난대묘선蘭臺妙選, 성명총화星命愡話 이상은 책을 펴놓고 강론한다.


  취재 시험에서 과목이 명과학 이외에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은 교체 근무를 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보통 명과학과 지리학은 1년 단위로 교체 근무했던 것이다. 


  19세기(《서운관지》)에 오면 시험과목이 달라진다.


  《원천강袁天綱》[배강이다.]과 《협길통의(協吉通義)》·《대전통편》 [이상은 임문이다. ○ 처음에는 《극택통서(剋擇通書)》를 썼는데, 뒤에 갈아서 《범위수(範圍數)》·《서자평(徐子平)》·《응천가(應天歌)》·《시용통서(時用通書)》를 썼다.

  

  이상에서 보듯이 조선 후기로 오면 취재 시험은 《원천강》,《협길통의》,《대전통편》등으로 변화가 온 것이다. 특히 《협길통의》의 부상이 눈에 띈다. 이 책은 정조의 명에 의하여 중국의 두 책을 참고하여 새로이 교정하여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 종합하여 차례를 정하였으며 추측점험推測占驗의 설을 첨가하고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이치로 재단’했기 때문이다.


  《협길통의協吉通義》 [22권이다.] 정조 갑인년甲寅年[1794, 정조 18]에 위감魏鑑의 《상길통서象吉通書》와 매각성梅 成의 《협기변방서協紀辨方書》를 취하여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 종합하여 차례를 정하였으며 추측점험推測占驗의 설을 첨가하고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이치로 재단하였다. 을묘년乙卯年[1795, 정조 19]에 서적이 완성되었다. 본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다. 


  다음은 관련 몇몇 문헌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소개는 《서운관지》서기조의 것들로 전혀 바꾸지 않고 직접적인 인용하기로 했다. 이러한 태도는 시중에서 유통되는 이들 지식들이 너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원천강삼성삼명지남袁天綱三星三命指南》 [10권이다.] 당나라 원천강이 지었다. 발단發端·귀신貴神·식신食神·녹신祿神 등 15유類로 나누었다. 본감[관상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다.

  《서자평삼명통변연원徐子平三命通變淵源》 [2권이다.] 송宋 나라 서대승徐大升이 지었다.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어려서부터 삼명三命의 술術을 사모하여 고인高人을 찾아뵈고 물으니 서자평의 진수정국역학眞數定局曆學을 전수傳授하였는데, 여러 해 만에 자못 진취眞趣를 알고 유에 따라 편차를 이루어 그 첩경捷徑을 찾았다.”

하였다. 본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다.

  《범위수範圍數》 [2권이다.] 명나라 조영趙迎이 지었다. 오로지 점서占筮의 술術을 주로 하였는데, 자서에 이르기를, “제가諸家의 설을 모아 유에 따라 구별하였다.” 하였다. 앞은 도식문圖式門이고 다음은 기례문起例門이고 또 다음은 기원문起源門·유격문流格門 등인데, 모두 15문이다. 본감[관상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응천가應天歌》 [4권이다.] 송나라 곽정郭程이 지었다. 양회楊恢의 서문에 이르기를, “곽정의 자字는 거비去非이다. 이인異人을 만남에 인연하여 이 글을 지었다.” 하였다. 본감[관상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다.

  《소강절심역매화수邵康節心易梅花數》 [1권이다.] 지은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명나라 통주 태수通州太守 하앙夏昻이 산개刪改하고 교정하였다. 그 방법은 귀서龜筮[거북점과 시초점]를 쓰지 않고 해당 일진日辰으로 수數를 뽑아내고 수로 괘卦를 뽑아내는 것이다. 다 강절康節[1011~1077, 소옹邵雍의 시호]에게서 나온 것이라 하나 미더운 것인지 모르겠다. 본감[관상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선택요략選擇要略》 [3권이다.] 본조[조선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지李純之(?~1465)가 지었다. 오로지 일진으로 길흉을 가리는 술術을 말하였다. 본감에서 책판을 간직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조선시대 명과학을 살피려면 그 전에 알아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책력에 의하여 결정된다. 연신年神 방위3), 월신 일기月神4) 日期 방위, 4대길신四大吉時5), 인신人神6), 일유[신]日游[神]7) 등을 살펴야 하고 연구궁年九宮8), 월구궁月九宮9), 건제십이객建除十二客10),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11) 등을 참고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주명리학은 이와는 다른 체계이다. 그만큼 자생적 요소가 많다고 할 것이다.  


  Ⅳ 명과학 전문 인력[합격자]


  원래 명과학은 잡과의 하나인 음양과 가운데 하나였다. 잡과의 음양과는 명과학 이외에도 천문학, 지리학이 있다.《조선시대 잡과방목》에 기록된 음양과의 합격자는 865명이다. 성종조 1명, 중종조 33명, 명종조 14명, 선조조 23명, 인조조 1명, 숙종조 17명, 경종조 11명, 영조조 163명, 정조조 85명, 순조조 195명, 헌종조 83명, 철종조 68명, 고종조 171명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 음양과 합격자 숫자[865명]는 다른 영역 역과譯科 총 2,977명, 의과醫科 총 1,548명, 율과律科 총 733명, 주학籌學12) 1,627명 등과 비교하여 가장 적은 것이다.

  성종 2년[신묘식 1471년]부터 숙종 8년[임술증시 1662년]까지는 전공 분야를 설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공 분야를 선정하여 뽑은 것은 숙종 39년[계사식 1713년]부터이다. 다만 명과학이 합격자를 낸 것은 영조 23년[정묘식 1747년]부터였다.

  분류[숙종 39년[1713]부터 고종 22년[1885]까지

  천문학 481명13)

  지리학 115명14)

  명과학 197명


  명과학은 영조 23년[정묘 1747] 식년式年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시대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영조 20명

23[1747] 정묘식(丁卯式) 홍현주

29[1753] 계유식(癸酉式) 지일승, 김흥문

30[1754] 갑술증(甲戌增) 이동성, 정수완, 지일빈, 홍득주

35[1759] 기묘식(己卯式) 이말

39[1763] 계미증(癸未增) 변광유, 이수겸

44[1768] 무자식(戊子式) 김정환, 최경렬

47[1771] 신묘식(辛卯式) 전종혁 이정길

49[1773] 계사증(癸巳增) 이시화 강희보 지경철 조행옥

50[1774] 갑오식(甲午式) 홍처중

50[1774] 갑오증(甲午增) 조홍원


 〇 정조(正祖)..17명

04[1780] 경자식(庚子式) 최광빈

07[1783] 계묘식(癸卯式)  이의관

10[1786] 병오식(丙午式) 홍성구, 이언술

13[1789] 기유식(己酉式) 지경비, 홍경중

14[1790] 경술증(庚戌增) 김재후, 최복기, 전종주

16[1792] 임자식(壬子式) 김성기, 이정복

19[1795] 을묘식(乙卯式) 김한적, 안규상

22[1798] 무오식(戊午式) 지경흥, 손행검, 전계환, 김구서


 〇 순조(純祖)...69명

01[1801] 신유증(辛酉增) 김성양, 조현묵, 이명신, 차영철

01[1801] 신유식(辛酉式) 이의구, 안경신, 박치영, 이현상

03[1803] 계해증(癸亥增) 지택붕, 한사의, 지택구, 유운규

04[1804] 갑자식(甲子式) 조상순, 송문연, 양식, 김중진, 전치정

05[1805] 을축증(乙丑增) 지택룡, 김원, 이응무, 피상오

07[1807] 정묘식(丁卯式) 김묵, 김중정, 김한규, 이명원

09[1809] 기사증(己巳增) 최상즙, 홍경학, 전익순, 전성순

10[1810] 경오식(庚午式) 이영진, 박주환, 조후, 김수로

12[1812] 임신증(壬申增) 이일수, 최경식, 최성원

13[1813] 계유식(癸酉式) 이수담, 최수옥, 이일구, 이응수

16[1816] 병자식(丙子式) 홍의양, 안국헌, 조택규, 김의종

19[1819] 기묘식(己卯式) 이의영, 전치항, 최진

22[1822] 임오식(壬午式) 최영원, 지택홍, 이덕명

25[1825] 을유식(乙酉式) 최석의, 박명협, 김유진, 이병홍

27[1827] 정해증(丁亥增) 최석희, 이일유, 최성민, 최영환

28[1828] 무자식(戊子式) 김병호, 박태환, 지유상

31[1831] 신묘식(辛卯式) 최봉환, 이정모, 김진호, 변룡규

34[1834] 갑오식(甲午式) 피병헌, 이제로, 김헌주, 지유형, 현용규


 〇 헌종(憲宗)...28명

01[1835] 을미증(乙未增) 김창훈 이긍수 이규성 최석관

03[1837] 정유식(丁酉式) 최도연 김상은 박회영 이관무

06[1840] 경자식(庚子式) 이희수 최기환 이건모 전효만

09[1843] 계묘식(癸卯式) 최상환 이한도 홍의녕 유익상

10[1844] 갑진증(甲辰增) 김인복 최규신 이계상

12[1846] 병오식(丙午式) 이정수 전우열 최석헌 박응조

14[1848] 무신증(戊申增) 이긍순

15[1849] 기유식(己酉式) 김동만 한진하 임긍연 최한철


 〇 철종(哲宗)...27명

01[1850] 경술증(庚戌增) 임우종 안재흥 한응익 한응종

03[1852] 임자식(壬子式) 지유달 김재련 박형수 유한철

06[1855] 을묘식乙卯式  최규덕, 최용진, 김제정, 최성필

09[1858] 무오식(戊午式) 이흥선 김재림 안병립

10[1859] 기미증(己未增) 안영기 이문현 유연상 김동표

12[1861] 신유식(辛酉式) 유한익 김용완 전용석 곽효순


 〇 고종(高宗)...36명

01[1864] 갑자증(甲子增) 김인겸 김호영 김효철 김동훈

01[1864] 갑자식(甲子式) 윤홍 전영기 최정섭

07[1870] 경오식(庚午式) 안준 김건희

10[1873] 계유식(癸酉式) 전긍석 홍명환 이병혁 박유경

11[1874] 갑술증(甲戌增) 박유상

13[1876] 병자식(丙子式) 유한중 전종우

16[1879] 기묘식(己卯式) 김영로 이태원 박제건 전종학 박규영 김영대

19[1882] 임오증(壬午增) 지응호 지린석 김중학

19[1882] 임오식(壬午式) 한기종 유운원 변종규 전시묵 전태순 홍성환 유한목

22[1885] 을유식(乙酉式) 최해진

22[1885] 을유증(乙酉增) 변우식 정광식 최영직

  

  Ⅴ 명과학의 전문가적 특징


  충주忠州 지池씨는 적어도 명과학의 대가이다. 이들 가족은 몇 대를 두고 명과학에 합격자를 내고 외손까지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특히 지백원池百源 일가는 6대까지 명과학에 합격하거나 관련되어 있다. 이들 계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백원池百源-도함道涵-일승日昇-경비池景泌-택홍池宅鴻-유달池有達

                       -일빈日賓

                                  지경비의 외손 최정섭崔廷燮   


  지백원은《천기대요天機大要》15)정사본丁巳本[1737 영조 13]을 중간한 사람이고 그의 손자인 지일빈은 혼효중성昏曉中星의 고금 이후異候를 새로운 법으로 증정證正하여 계미본[1751 영조 27]을 낸 사람이다.

  지백원의 아들인 지도함池道涵(?~?)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관력이 현감이었다. 지도함의 쌍둥이 아들16) 일승日昇(1729~?)과 일빈日賓(1729~?) 형제가 1년을 사이에 두고 명과학에 합격한다. 당시 23세인 지일빈이《천기대요》를 1751년에 계미본을 증정한 것을 보면, ‘공부’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것이다.

  지경비池景泌(1766~?)는 백원의 현손자이고 도함의 손자이고 일승의 아들이다. 정조 13 기유식己酉式[1789]에 합격했고 당시 본인 관력은 겸교수 구임久任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였다. 처는 남양南陽 이씨였다.

  지택홍(池宅鴻(1805~?)는 백원의 5대손으로 경비의 아들이다. 자는 성유聖有 순조 22 임오식(壬午式, 1822) 당시 본인관력은 수찬관修撰官 관상감추길관觀象監諏吉官 판관判官이었다. 

  지유달(池有達(1832~?)은 백원의 6대손으로 택홍의 아들이다.  자는 통원通源 철종(哲宗) 03 임자식(壬子式, 1852)로 명과학에 입문했다. 당시 본인의 관력은 아버지 택홍을 이어 수찬관修撰官이었다. 지유달의 처는 선산善山 김金씨로 처의 아버지는 김영섭金英燮로 율과律科가 전문과목이었고 율학교수律學敎授를 지냈다. 

  최정섭崔廷燮(1833~?)은 지경비池景泌의 외손자이다. 본관은 철원鐵原,  자는 경흠景欽이다. 고종 01 갑자식甲子式[1864]로 명과학에 입문했다. 아버지는 최상즙崔尙楫으로 명과학·지리학 양과를 겸했고 교수 판관을 지냈다. 단자單子에는 조부·증조부, 외조, 처부·증부·증조까지 가계를 적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관리 임용에서17) 필요한 사조단자四祖單子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사조四祖는 부·조·증조·외조를 말한다. 그런데 처가의 3조까지 확대된 것이다. 고종 이후의 관리 임용 제도의 변화로 생각된다. 사조단자와 함께 보거단자保擧單子가 있었다. 인물의 천거나 과거시험에서 지원자의 신원을 보증하기 위하여 보증인의 관직·성명 따위를 적은 단자를 말한다. 보증인은 보거주保擧主, 거주擧主, 천주薦主라고도 했다.18) 명과학에

지원할 경우 2명의 보거인이 필요한데 1명은 명과학의 관리중 판관 이상의 직을 가져야 했다. 


  지일항池日恒의 4대를 거쳐 명과학에 입문하고 있다.

  

  지일항池日恒-경철景喆-택붕池宅鵬-유상(池有祥


  지경철池景喆(1753~?)은 지일항의 아들이다. 영조 49년[1773] 계사증癸巳增. 당시 본인 관력은 겸교수兼敎授 와서별제瓦署別提 구임久任 감목관監牧官 현감縣監 영부사과永付司果였다. 아버지 지일항池日恒의 관력은 동지同知였다. 

  지택붕(池宅鵬(1781~?)은 지일항의 손자이며 경철의 아들이다. 순조 03[1803] 계해증癸亥增로 명과학에 발을 들여 놓았다. 당시 본인의 관력은 훈도訓導 겸교수兼敎授 정正이었다. 단자에 외가가 빠지고 처가의 사조가 들어간 것도 특기할 일이다. 외가를 소개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기보다는 해당 학과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택붕의 처가 사조는 모두 해당 학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유상(池有祥(1803~?)은 지일항의 현손이고 지택붕의 아들이다. 순조 28[1828] 무자식戊子式로 명과학에 입문했다. 


  또 다른 지경인池景仁 가계가 있다.


지경인池景仁-택구宅龜-유형有亨

              -택룡宅龍


  지택구池宅龜(1780~?)는 지경인의 아들이다. 순조 03[1803] 계해증시癸亥增試로 명과학에 입문했다. 당시 본인의 관력은 겸교수兼敎授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 찰방察訪이었다. 아버지 지경인池景仁의 관력은 사과司果였다.

  지택룡(池宅龍(1788~?)은 지경인의 아들이고 택구의 동생이다. 순조純祖 05[1805] 을축증시乙丑增施로 명과학에 입문했다. 당시 관력은 판관判官이었다. 

  지유형(池有亨(1813~?)은 지경인의 손자이고 원래 택룡의 아들인데 택구의 집으로 양자를 갔다. 순조 34[1834] 갑오식년甲午式年으로 명과학에 입문했다. 

  이상의 충주 지씨 이외에도 지유달池有達19)-응호應浩, 지유형池有亨-응수應洙-인석麟錫의 두 가계도 고종 19[1882] 임오증시壬午增試로 나란히 명과학에 입문하고 있다. 


  이상은 충주 지씨 몇 집의 가계를 명과학에 입문한 보기이다.20) 이런 과정을 볼 영조 이후의 잡과 즉 기능직에는 가승적인 전통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입장으로 보더라도 전문 직종이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지 참고할 만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들 가문들이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주장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근래의 지창룡池昌龍이란 지사地師가 있었다. 그는 몇 백년의 가업을 이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분은 문화재로 지정하여 인정하는 것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참고 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구중회(2009) 한국의 무경, 경문화와 역사, 민속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계선림季羨林(1997) 돈황학사전, 상해사서출판사

대전회통大典會通

성주덕成周德(1818) 서운관지書雲觀志

조선잡과방목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2)

충주지씨대종족보

KRpia, 한국의 지식콘텐츠

KoreaA2Z, 동방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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